건축가 김진애(57)가 가장 많이 받는 오해 혹은 선입관은 이런 것이다. 첫째, 결혼 못 했거나 안 했을 것이다. 둘째, 결혼했더라도 이혼했을 것이다. 셋째, 결혼했어도 애는 없을 것이다. 넷째, 애가 있다면 아들만 둘일 것이다 등. 그런데 이 모든 선입관은 다 꽝이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연애를 시작해 5년간 열애 끝에 결혼했고, 그 결혼을 가장 럭키한 일이었다고 믿으며, 딸딸이의 엄마로 자랑스럽게 살고 있다.
"제가 결혼을 했고, 게다가 이혼은 안 했고, 두 딸이 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낀다는 젊은 여성도 있어요. 하하"
TV토론 프로그램이나 강연, 신문칼럼, 블로그 등을 통해 전해오는 그녀의 이미지는 '센 여성'이다. 당당함, 논리적이고 유려한 입담, 거침없고 강한 포스 뒤에 따라다니는 그녀의 화려한 이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20대엔 서울대 공대생 800명 강누데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30대엔 'MIT 박사', 40대 '미국 <타임>지가 꼽인 21세기 차세대 리더 100인'으로도 유명했다. 도시 설계의 일인자로 서울 인사동길을 디자인했고, 산본신도시를 설계했다. 대통령자문 건설기술·건축문화선진화위윈회 위원장, 블로그 정치인 등 그의 호칭은 참으로 많다. 여기에 지난해 말 이름이 하나 더해졌다. 민주당 비례대표 '제18대 국회의원'으로 공식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건축가 사무실은 당분간 휴업 상태라 국회 사무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젊어 보인다고 인사하자 요즘 앞머리를 내린 덕에 '마이너스 5년 동안'소리를 듣는다며 매우 만족한 표정이다. (실례되는 표현일까) 귀여움마저 묻어난다.
천하무적, 여걸 같은 그녀도 무서워하는 것이 있을까. 그런데 뜻밖의 답이 돌아온다.
"<TV 동물농장>에서 유기견 학대하는 장면은 무서워서 못 봐요. 저희 집이 4층인데 옥상에 비상용 밧줄을 준비해두었어요. 밀폐 공간에 가면 비상구부터 확인해요. 겁이 많지요. 특히 사고나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이 많아요. 그 원인은 제가 10남매인데 어릴 때 삼형제를 모두 사고로 잃고, 6·25와 4·19를 겪어 무의식에 그런 두려움이 자리 잡았나 봐요."
게다가 그녀는 일주일 전 10년 동안 자식처럼 키우던 진돗개가 죽어 아직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양해를 구한다.
그의 여리디여린 마음을 만나며 선입관이 깨질 때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이래서 사람은 만나봐야 안다.
김진애, 이상한 아이....
1남 6녀 중 셋째 딸이다. 당연히 오빠를 귀히 여기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이웃에게 "가진 것 딸밖에 없습니다"라는 농담을 자주 하셨고, 솔직한 고모는 이마가 넓은 김진애를 보고 "장군감인데..." "고추를 달고 나왔으면 좋았을 걸"하는 말들을 서슴없이 했기에 '별로 기분 좋지 않은 어린시절' 이었다고 회상한다.
'왜 여자들은 죽어서 자기 성을 남기지 못할까?' 등 궁금한 것이 많아 이것저것 물어보면 어른이나 친구나 질문 많은 아이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입을 닫아버렸고 책과 영화, 만화책 등에 빠져 지냈는데, 열살에는 책 세권을 달달 외우기도 했다.
"엄마는 하루 종일 집에서 일하는데 그 노동에 대해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죠. 늘 제2의 인간으로 대접받는 엄마의 삶이 모사땅했어요. 그래서 중고등학생 시절에 가치관이 무엇이냐는 친구의 물음에 '힘'이라고 답한 기억이 나네요." '될성부른 나무'였던 게다. 지금까지 꿈꾸고 실천한 모든 생각의 기본은 10대에 정해진 것이란다. 이화여중고실절 아름다운 캠퍼스와 노천극장을 보며 자연은 훼손해선 안된다는 인식이 생겼고, 불평등한 여성의 존재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키워야 했으며, 공부를 열심히 해 빨리 독립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는 반에서 30~40등 했어요. 영화 보고 놀러 다니다 겨울방학에 정신차리고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리고 열두 달, 내 생애에 그 때처럼 독하게 공부한 적은 없었어요. 정말 제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켰어요. 집중력이나 강한 몰입은 그때 형성된 것 같아요. 인생에 한번쯤은 자신에게 독해져야 하는 순간이 오고, 그런 극복이야말로 살아가는 힘이되죠. 그것이 저의 좌우명이기도 하고요."
김진애, 우선순위
1971년 보수적인 서울대학교 공대의 전설, 800명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본래 문과적 성향이 강했지만 이과를 택한 건 '독립해서 벌어 먹고살기에 나을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유신시절이라 학교 공부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1학년 때 만난 남편과 오랜 연애를 통해 정신적 유대가 깊었다고.
스물넷에 결혼해 한 아이의 엄마였던 그는 미국 학생들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MIT 공대에 유학을 결정한다. 물론 남편과 함께 였다. 공부하며 둘째 아이를 낳아 키우다 마지막 논문을 앞두고 남편이 먼저 귀국해야 했는데, 그 편에 아이를 보내지 않았다. 넉 달 동안 두 아이를 안고 업으며 기어이 논문을 오나성했다.
"아이들을 먼저 보냈으면 편하게 논문 준비를 할 수 있었겠죠. 그렇지만 아이들을 보내고 그리워하는 것보다 힘들어도 함께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매순간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정하면 그 뒤의 상황은 기꺼이 감내한다. 그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다. 쿨한 거 맞다.
"당신의 장점? 어떤 상황에서나 긍정적이라는 거."
어느 날 남편에게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을 물어봤다. 부부가 오래 살다 보면 시들해지는 때가 오게 마련이니, 그런 직격 인터뷰도 필요하다.
3초쯤 후 나온 남편의 답은 그럴듯했다. 뭐니뭐니해도 이 남자는 나를 꿰뚫고 있구나, 나를 인정하는 구나, 짝에게 인정받는 것인 기분이 좋다. 남편은 역시 나의 '천적'이라는 표현, 참 섹시하다.
김진애, 자녀 교육
그녀는 두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 수능을 마친 뒤 선생님을 찾아뵌 것이 전부다. 그는 학교의 좋은 교육을 믿는다고 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작은 딸이 며칠째 학교가기 싫다는 거예요. 잠깐이겠지 했는데 계쏙 그러더군요. 그래서 진지하게 말했어요. '그럼 학교를 그만두자. 대안학교나 검정고시도 있으니 네가 결정해' 하니까 두 달간 생각하더니 '그냥 다닐게' 하더군요. 무슨 일이든 부모가 결정하고 선택하면 아이들은 자생력이 생기지 않아요. 지식은 높아졌지만 아이들의 의지는 점점 박양해집니다. 늘 보호된 환경과 정답만 있는 사회에서 살다가 끝없는 선택과 정답이 없는 사회로 나오면 아이들의 인생이 얼마나 허약해질까 걱정입니다."
부부가 공부에는 한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2(엘리트):8(범인)의 비율을 늘 설명했다.
"나는 너희가 엘리트에 속하는 2퍼센테 대열에 들어가기 위해 힘들게 경쟁하길 원하지 않는다. 거기에 속하지 않아도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방법은 많다. 공부는 공부 시간에만 하는 게 아니고 매이매일 세상을 통해 배우고 자라는 거란다."
이러한 그녀의 교육 철학을 반영하듯 두 딸은 명문고나 명문대에 진학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명공학과를 졸업한 큰딸은 키우던 고양이가 죽은 뒤 수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엄마가 고2때 독해지던 순간처럼 딸도 스물네 살에 독하게 공부를 시작해 다시 대학에 입학했고, 5년이 흘러 이제 막 수의사 자격증을 땄다. 둘째 딸 역시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인턴 생활을 하고 있다. 대학원 진학은 필요하다고 느끼면 돈 벌어서 가겠다는 것이 딸의 의지다. 과연 모전여전이다.
자녀들의 강한 독립심 역시 어린시적부터 실천한 용돈 관리에서 비롯된다.
"일을 계속했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파출부를 부른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는 스스로 선택해서 일하게 했어요. 설거지, 현관청소, 청소기 돌리기, 걸레질 등 집안일을 아이템별로 단가를 매기게 하고 그 대가를 주었죠. 용돈이 궁하면 집 안이 반짝반짝 했어요."
그것도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그는 부모란 자식이 홀로 서는 것을 도와주고 지켜보는 존재라고 믿는다.
김진애, 사람과 집
산본 신도시, 인사동길을 설계하면서도 그가 가장 유념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건축이나 도시설계가 근본적으로 자연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떡하면 죄를 덜 짓고 건축을 할까 고민하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선을 연결하는 일, 에너지를 덜 쓰는 일, 차보다는 인간의 보행을 위한 길이 우선이고 고층아파트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녹지 공간을 확보하는 데 늘 신경을 열어두지요."
자연을 살리는 일이 인간을 살리는 길임을 누구보다 고민하는 건축가다. 우리는 통상 집을 창과 문과 벽과 지붕이 있는 물리적인 실체로 생각하지만, 그는 삶을 담는 그릇으로 본다. 그래서 집을 보면 사람이 보이고, 사람을 보면 집이 그려진단다. 우리 시대가 지어내는 집들이 마땅찮은 것은 아무래도 사람 냄새나는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파트들은 모델하우스나 호텔같이 폼만 잡으며 남들이 어떻게 볼까 신경 쓴다.
"자신의 삶, 가족의 모습을 집에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몰고 나의 집이 나다운가, 우리 집이 우리 가족다운가 생각해보세요. 집은 추억이거든요."
그는 집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해 집을 통하여 삶의 흔적을 읽어가며, 집은 곧 그 사회의 정서라고 말한다. 집을 물질로 지어지는 것이되 표정이 있고, 눈과 입이 있고,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눈이 마음의 창인 것처럼, 창은 집의 눈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좋은 집이란 무엇인가? 시간이 배어 있는, 즉 나이 먹어가는 집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만큼 애착이 가서 계속 가꾸는 집, 그래서 존재감이 큰 지비앋.
김진애, 공간 정치
김진애는 10여년 동안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아왔다. 그런데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나도 저렇게 될까 봐"였단다. 불합리하게 처리되는 건축 관련 일에 직접 나서기 위해 소통이 가능할 것 같은 당에 입당한 것이 정치 입문 계기다.
"보통 건축가들은 기량이 쌓이면 정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회 참여를 합니다. 하지만 정책 참여나 제안을 해도 실제 행정이나 정치는 움직여주지 않지요. 그러다 보니 직접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겼죠."
그는 정치도, 건축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고나계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무엇을 통해 조정해야 할까. 그는 소통과 설득, 때로는 위협과 매혹의 스킬도 필요한 것이 정치라고 한다. 사람 사이의 좋은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고민하고 실현하는가가 정치권의 역할이라지만 그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그는 오래전에 건축을 넘어 사회, 문화, 예술의 다양한 분야에 뜨거운 필력으로 30권이 넘는 저서를 출간했다. 이를 통해 그가 끊임없이 추구한 것은 사람에 대한 가치관이다. 존경 받는 정치인이 없는 이 시대에 그녀마저 정치계로 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다시 희망을 갖는다. 불신과 환멸로 얼룩진 '정치'라는 불행한 이름을 누군가가 닦아내고 회복시킬 수 있다면 그 기대의 선보에 있는 사람, 김진애를 믿고 싶기 때문이다.
tip. 김진애가 말하는 좋은 집은?
추억이 많은 집
집에는 모쪼록 구석구석이 많아야 추억이 많아지며, 어른들만 폼 잡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마음껏 어지르고 마음껏 술래잡기를 하는 집이 되어야 이야깃거리가 많아진다. 넓은 거실만 만들려 할 게 아니라 구석을 많이 만들자. 숨을 구석, 비빌 구석, 기댈 구석, 걸 구석 등.
맘껏 어지르는 아이들 방
아이들 방을 너무 조용하게 하지 말자. 오히려 비사교적이고 내성적인 아이가 된다. 아이들은 방에서 나오고 싶은 유혹을 견디며 스스로 공부해야 큰다. 그래서 모쪼목 마음껏 자기 방을 어지르고 스스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가끔은 밖에 나가 맘껏 뛰놀며 동네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아이가 되어야 나중에 크게 자란다.
집 곳곳에서 사랑의 몸짓을
부부가 행복해야 집도 건강하다. 마스터 배드룸을 멋지게 장식한다고 부부 사이가 행복해지나? 부부의 온갖 사랑의 몸짓은 집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스치는 손길, 오가는 눈길, 같이 젖은 손, 어깨를 보듬는 팔, 상쾌한 뽀뽀가 집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지 한번 돌아보자.
체험 동선이 긴 집
동선이 짧은 집은 나쁜 집이다. 체험 동선이 긴 집이 좋은 집이다. 사람들은 거닐면서 수많은 만남, 추억,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만나야 이야기가 생긴다. 어떻게든 동선을 줄이려는 아파트는 이제 재고해보자.
1953년 생으로 이화여중·고와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대학교 건축학 석사와 환경설계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본신도시, 인사동길 설계와 같은 도시 설계도 하고, 밀라노 트리엔날레 서울전시관, <서울 600년>전, <미디어시티 서울> 등의 전시 작업을 해왔다. 건축 웹진 '아크포럼'(www.archforum.com)을 운영하며 <타임>지가 꼽은 '21세기 차세대 리더 100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 민주당 비례대표 제18대 국회의원이다.
미즈내일: 박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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